귀로이야기 목록윤서린전: 졸업여행

마지막 친구

윤서린전: 졸업여행 · 5화

여행 가방이 천천히 밀려났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길게 이어졌다.

드르륵.

나는 하은과 유정의 손을 더 세게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있지?”

왼손에서 하은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오른손에서는 유정이 손이 떨렸다.

“응.”

유정이가 대답했다.

“여기 있어.”

문밖의 노래는 멈춰 있었다.

다솜도.

채영도.

지수도.

세아도.

보민도.

더 이상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복도에는 누군가 있었다.

문틈 아래로 들어오는 작은 전구 불빛이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다섯 개의 그림자가 문 앞을 천천히 오갔다.

“서린아.”

하은이가 속삭였다.

“불부터 켜자.”

“어떻게?”

“차단기가 내려간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은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어디 가?”

“분전함 확인하려고.”

“싫어.”

“같이 가자."

나는 하은이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냥 여기 있어. 제발 부탁이야. 불 안 켜도 돼.”

내 목소리가 빨라졌다.

“어두워도 괜찮으니까 나가지 마.”

하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무언가가 웃었다.

짧고 낮은 웃음.

다솜이 같기도 하고 세아 같기도 했다.

나는 하은이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제발.”

“또 가겠다고?”

유정이가 덜덜 떨며 거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라진 친구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이제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단거 알잖아."

목이 손으로 쥔 듯 메었다.

“그런데 다 없어졌잖아.”

“이번에는 마지막이야.”

그 말을 하는 하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는 게 무서웠다.

---

복도에서 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걸쇠가 버텼다.

다시.

찰칵.

유정이가 숨을 삼켰다.

“유정아, 서린이랑 있어.”

세 사람은 어둠 속에서 잠깐 침묵했다.

스윽.

양 쪽 손이 동시에 내 손을 빠져나갔다.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심장은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지 귀에도 일정한 박자가 들렸다.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잡히지 않았다.

“어디 있어?”

나는 바닥을 더듬으며 일어났다.

그 순간 탁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점검문을 막아둔 탁자였다.

문이 열렸다.

낡은 경첩이 울었다.

끼이익.

“하은!”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무릎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혔다.

손을 뻗었지만 차가운 벽과 열린 문만 만져졌다.

복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잠시 뒤 아주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쾅.

그리고 비명.

“악!”

유정이였다.

나는 문 바깥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유정아!”

그 순간 방 안의 불이 들어왔다.

탁.

너무 갑작스러워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눈을 찡그린 채 복도를 바라봤다.

사람은 없었다.

“유정아?”

통로 바닥에 휴대전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정이 것이었다.

화면에는 녹음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었다.

녹음을 중지했다.

파일은 불과 열일곱 초짜리였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유정의 발소리가 들렸다.

사박.

사박.

거친 숨소리.

그리고 작은 목소리.

“조금만 더.”

나는 손을 멈췄다.

유정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잠시 침묵.

그리고 유정이 아주 작게 말했다.

서린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뒤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쾅.

---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서린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다솜이도 같은 말을 했다.

어젯밤 영상 속에서.

친구들은 처음부터 나에게 무언가를 숨겼다.

눈가가 젖는게 느껴졌다.

나는 손목의 팔찌를 들어 보였다.

하은이가 직접 묶어준 팔찌.

“나는 이런 거 못 견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나한테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조금만 찾아보자고 했고.”

“…….”

“조금만 더 가보자고 했어.”

나는 팔찌를 움켜쥐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으면 더 위험해.”

나는 출입문을 바라봤다.

아까 문 앞에 있던 그림자들은 사라져 있었다.

문틈 아래 전구 불빛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203호에서 복도 끝까지.

마치 길을 표시해둔 것처럼.

“따라오라는거야?”

유정의 휴대전화에서 다시 녹음이 재생됐다.

“조금만 더.”

유정이의 목소리가 방 안에 흘렀다.

“서린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나는 재생을 껐다.

그리고 길을 따라 걸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혼자 남았기 때문이었다.

---

복도에 늘어선 작은 전구들은 노란빛을 냈다.

호텔 장식용 전구처럼 보였다.

그 빛을 따라 걸었다.

구관 연결 통로.

꺼진 휴게실.

세탁실.

다솜이와 채영, 지수, 세아가 사라진 장소들을 차례로 지났다.

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흰 수건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아까 틴트로 적혀 있던 네 명이라는 글씨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두 명.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왜 두 명이지?

다시 걸었다.

전구는 구관 대욕장을 지나 노천 족욕탕으로 이어졌다.

유리문 너머로 수증기가 가득했다.

밖이 어두운데 아침이 지났는지, 저녁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족욕탕에는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콸콸.

처음 여관에 왔을 때부터 들렸던 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수증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돌담 옆에 작은 직원용 출입문이 있었다.

그 문 너머로 무악산이 보였다.

족욕탕 가장자리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수증기가 얼굴을 덮었다.

바로 옆에 있는 탕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친구일 줄도 몰랐어.”

하은이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걸음을 멈췄다.

나는 수증기 속에서 소리를 쫓아 손을 뻗었다.

하은이는 없었다.

“……하은아?”

대답이 없었다.

“백하은.”

수증기 너머를 건너갔다.

아무도 없었다.

“하은아!”

나는 족욕탕 주변을 뛰어다녔다.

돌담 뒤.

출입문 앞.

탈의실.

사람은 없었다.

“안 간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약속했잖아!”

내 손에는 차가운 팔찌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친구가.

---

나는 한동안 족욕탕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세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뿐이었다.

하나.

윤서린.

한 명.

여덟 명이 함께 왔던 여관에 나만 남았다.

그때 물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아.”

다솜이었다.

나는 족욕탕을 바라봤다.

수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로 와.”

이번에는 채영.

“다들 기다리고 있어.”

지수.

“이제 무섭지 않아.”

세아.

“다 끝났어.”

보민.

“서린아.”

유정.

마지막으로 하은이가 말했다.

“나 여기 있어.”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렸다.

탕 안.

돌담 너머.

수증기 속.

열린 출입문 밖.

나는 귀를 막았다.

“거짓말.”

“서린아.”

“다 거짓말이야.”

“여기로 와.”

“싫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오라고 하지 마.”

일곱 친구의 목소리가 동시에 내 이름을 불렀다.

“윤서린.”

나는 직원용 출입문을 밀어젖혔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

여관 뒤는 곧바로 산이었다.

안개가 나무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과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었다.

마을 쪽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아!”

나는 아래를 봤다.

수증기 사이로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일곱 명.

여관을 둘러싸듯 흩어져 있었다.

“거기 있어!”

다솜이 목소리였다.

“내려오지 마!”

유정이도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오지 마!”

“서린아, 잠깐만!”

“싫어!”

나는 산으로 뛰었다.

입구에는 낮에 봤던 안내판이 서 있었다.

무악산 폐쇄등산로

낙석 및 사면 붕괴 위험.

출입 금지.

나는 붉은 통제선을 넘어갔다.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윤서린!”

“멈춰!”

“거기로 가면 안 돼!”

나는 더 빨리 달렸다.

젖은 흙이 운동화 밑에서 미끄러졌다.

나뭇가지가 팔과 얼굴을 긁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친구들이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목놓아 부르는 것처럼.

---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숨이 목구멍을 찢는 것 같았다.

폐쇄등산로 중간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나무 사이로 노란 전구가 줄지어 켜져 있었다.

여관 복도에서 봤던 것과 같은 불빛이었다.

공터 한가운데에는 흰 천이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터로 밀려 들어가듯 한 걸음씩 움직였다.

흰 천 위의 문장이 보였다.

윤서린, 생일 축하해.

우리 앞으로도 계속 해동 되지 말자.

그 아래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다.

생일 케이크.

꺼진 초.

필름 카메라.

그리고 어젯밤 우리가 찍었던 것과 똑같은 사진 한 장.

나는 숨을 멈췄다.

“……뭐야.”

안개 속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다솜이었다.

젖은 온천복도 아니었다.

다치지도 않았다.

평범한 옷을 입고 두 손을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서린아.”

그 뒤로 채영이 나왔다.

지수.

세아.

보민.

유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은.

일곱 명 모두 있었다.

다솜이가 울고 있었다.

보민이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하은이는 내 팔찌와 같은 은색 팔찌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다 여기 있어?”

친구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유정이가 앞으로 나왔다.

“서린아.”

“오지 마.”

“미안해.”

“오지 말라고.”

유정은 멈췄다.

하은이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서린아, 우리 말 좀 들어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 다 없어졌잖아.”

“안 없어졌어.”

하은이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다 괜찮아.”

“거짓말.”

“진짜야.”

“다 거짓말이잖아.”

나는 뒤로 물러났다.

공터 뒤쪽으로 산길이 더 이어져 있었다.

안개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솜이도.”

나는 친구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채영이도, 지수도, 세아도, 보민이도.”

손가락 끝이 떨렸다.

“유정이랑 너까지.”

하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나만 몰라?”

그 질문에 일곱 친구의 얼굴이 동시에 무너졌다.

유정이가 말했다.

“서린아.”

잠시 입술을 떨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장난이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을 때,

발밑에서 작은 돌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아래에서는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귀로에서 이어 읽기
이야기 목록 · 귀로 열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귀로 — 사람이었던 귀신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