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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

윤서린전: 졸업여행 · 4화

화면 속에는 다섯 명이 있었다.

유정.

하은.

보민.

그리고 나.

화장실 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또 하나의 나.

나는 화면과 실제 방을 번갈아 봤다.

실제 화장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텔레비전 속의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얼굴에 붙인 채 천장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내가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꺼.”

내가 말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거 끄라고.”

유정이가 리모컨을 찾았다. 탁자 아래에도, 이불 사이에도 없었다.

텔레비전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코드 뽑아.”

보민이가 벽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전원선을 뽑는 순간 화면이 검게 죽었다.

나는 눈물이 숨을 막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곧 검은 화면 위로 방 안이 비쳤다.

내가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

내 앞에 하은이와 유정, 보민이가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 앞.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검게 꺼진 화면만 한참 바라봤다.

방 안에는 네 명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방금 본 거 맞지?”

내가 물었다.

하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거기 있었어.”

나는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또 한 명.”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 대답 안 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유정이의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차가운 유리였다.

방금까지 화면 안에서 웃고 있던 내 얼굴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 아래에 흰 숫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5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유리 안쪽에서 떠 있는 숫자 같았다.

---

우리는 텔레비전 위에 이불을 덮었다.

보지 않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현관문 앞에 가방과 낮은 탁자를 밀어놓았다.

걸쇠가 잠겨 있는지 세 번 확인했다.

창문도 잠갔다.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두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아무도 움직이지 마.”

내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뭘?”

유정이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도 오지 않았다.

사라진 네 친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 휴대전화는 온천탕에 빠져 꺼졌고, 다른 친구들의 전화에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도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움직일 때마다 한 명씩 없어졌다.

다솜이는 방에서.

채영이는 복도에서.

지수는 204호에서.

세아는 세탁실에서.

나는 손목의 매듭 팔찌를 만지작 거렸다.

낯선 것에 의지하고, 의지하던 것이 사라졌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휴대전화 화면에 표시된 시간은 오전 6시 03분이었다.

그런데 체감으로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온천수가 흐르는 소리도 멎어 있었다.

나는 친구들을 봤다.

유정이는 현관 쪽에 앉아 있었다.

하은이는 내 옆.

보민이는 창가 아래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넷.

나는 속으로 다시 셌다.

유정.

하은.

보민.

나.

넷.

“서린아.”

보민이가 불렀다.

“왜?”

“아까 네가 물었잖아.”

“뭘.”

“숨기는 거 있냐고.”

유정이가 고개를 들었다.

“보민아.”

보민이는 유정이를 보지 않았다.

내 손끝이 굳었다.

“뭐가 있는데?”

보민이는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말해.”

내가 다가갔다.

“뭘 숨겼어?”

“그게…….”

유정이가 끼어들었다.

“지금 보민이도-”

“보민이한테 물었어.”

나는 유정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할 거 있으면 제대로 말해.”

보민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그만하자.”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뭘?”

보민이는 입술을 떨었다.

“뭘 그만해?”

“…….”

“애들이 네 명이나 없어졌어.”

목소리가 떨렸다.

“이상한 영상에 내가 한 명 더 나왔고.”

나는 텔레비전을 가린 이불을 가리켰다.

“그런데 내가 예민한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솜이 없어졌을 때도 너희는 기다리자고 했어.”

유정이의 시선이 내려갔다.

“채영이가 나갈 때도 안 말렸고.”

“그때는—”

“지수는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서 물에 빠뜨렸어.”

지수는 실수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믿을 수 없었다.

“세아는 지수 목소리를 듣고 혼자 갔어.”

나는 보민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는 방금 그만하자고 했어.”

보민이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뭘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왜 울어?”

“무서워서.”

“나도 무서워.”

내가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계속 무서웠어.”

보민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확신했다.

친구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다솜이가 영상에서 했던 말.

서린이한테는 말하지 마.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들이 나에게 숨긴 것은 실종의 범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 여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여행 자체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왜 하필 여기야?”

내가 물었다.

유정이가 나를 봤다.

“졸업여행 가려고—”

“여기 네가 골랐잖아.”

여행지를 알아본 것도 유정이었다.

여관을 예약한 것도.

구관 대욕장을 가자고 한 것도.

“그럼 다 말해.”

“뭘 말하라는 거야?”

“너희가 나한테 숨긴 거.”

유정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은이가 내 팔을 잡았다.

“서린아, 진정해.”

나는 손을 뿌리쳤다.

“너도 똑같아.”

하은이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너는 내가 무서워하는 거 알잖아.”

“알아.”

“그런데 왜 계속 가지 말라고 안 했어?”

하은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라면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

내 목소리가 작아졌다.

“다른 애들이 다 안 들어도 너는 들어줄 줄 알았다고.”

하은이가 손을 뻗었지만 나는 물러났다.

“만지지 마.”

그 말을 하자 하은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

벽에 뭔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빛이 번진 줄 알았다.

출입문 옆 벽.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흰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검은 숫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17:30

나는 종이를 바라봤다.

“저거 언제 붙였어?”

친구들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유정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했어?”

나는 세 사람의 얼굴을 봤다.

하은.

유정.

보민.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종이를 떼려 했다.

손끝이 닿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막 물에서 건진 종이처럼 젖어 있었다.

그런데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17:30

“다섯 시 반.”

보민이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보민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놀라기보다,

무언가를 알아본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 알지?”

“뭐를?”

“다섯 시 반에 뭐가 있는데?”

“몰라.”

“방금 알았잖아.”

“진짜 몰라.”

보민이가 급히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갈게.”

나는 화장실 문을 봤다.

“안 돼. 혼자 가지 마.”

“방 안에 있는 화장실이야.”

“문 열어놔.”

보민이가 짜증 섞인 얼굴로 나를 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계속 대답해.”

“응.”

보민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손바닥 한 폭만큼 열어두었다.

나는 문 바로 앞에 앉았다.

---

“보민아.”

“응.”

“있어?”

“응.”

세면대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뭐 해?”

“손 씻어.”

나는 열린 틈으로 보민이의 어깨를 봤다.

분명 안에 있었다.

“아까 뭘 그만하자는 거였어?”

물소리가 멎었다.

“말했잖아.”

“거짓말하지 말고.”

“…….”

“다섯 시 반에 뭐가 있어?”

보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보민.”

“몰라.”

“너 지금 울고 있잖아.”

화장실 안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

“다솜이가 말하지 말랬어?”

보민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솜이가 어디 있어?”

“몰라.”

“채영이는?”

“나도 모른다고.”

“지수랑 세아도?”

보민이는 화장실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민아.”

“서린아.”

목소리가 떨렸다.

“응.”

“우리 다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이 이상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그냥. 다 괜찮을 거라고.”

“하나도 안 괜찮아.”

나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나한테 정확히 말해.”

보민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또 그 말이었다.

“뭐가?”

“…….”

“뭐가 미안한데?”

그 순간 유정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서린아, 그만해.”

나는 몸을 돌렸다.

“왜 네가 자꾸 막아?”

“보민이 힘들어 하잖아.”

“나는?”

“…….”

“나도 무서워 죽겠어.”

나는 화장실 안의 보민이를 다시 봤다.

“보민아.”

대답이 없었다.

“최보민.”

세면대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대답해.”

“응.”

보민이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멀게 느껴졌다.

“나 보고 말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문을 완전히 열었다.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

수도꼭지에서 물만 흐르고 있었다.

변기.

세면대.

샤워 공간.

작은 환풍구.

창문은 없었다.

사람이 숨을 곳은 없었다.

나는 샤워 커튼을 젖혔다.

아무도 없었다.

“최보민.”

하은과 유정이도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어?”

유정이가 중얼거렸다.

“너 알고 있잖아.”

나는 유정을 봤다.

“어디로 갔어?”

“나도 몰라.”

“방금까지 있었어.”

그때 거울 옆의 타일 하나가 조금 열린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이 곳을 지나갈 수는 없다.

사박.

통로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박.

아주 빠르게 멀어졌다.

“보민아!”

나는 거의 들어가려 했다.

“가지 마.”

“보민이가 저기 있잖아.”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나는 구멍 안을 바라봤다.

어둠만 있었다.

보민이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거울 위에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물이 뜨겁지도 않은데.

뿌연 습기가 유리 전체를 덮었다.

그리고 누군가 안쪽에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듯 문장이 나타났다.

미안해.

나는 거울을 닦았다.

글씨는 사라졌다.

손을 떼자 다시 나타났다.

미안해.

“어떻게…….”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봤다.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았다.

---

보민이가 사라진 뒤 우리는 대부분 실종되었다.

남은 사람은 세 명이 되었다.

유정.

하은.

그리고 나.

나는 화장실 문을 탁자로 막았다.

출입문 앞에는 여행 가방을 쌓았다.

창문 잠금 장치도 단단히 걸었다.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방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여전히 여덟 명이 있었다.

다솜.

채영.

지수.

세아.

보민.

유정.

하은.

나.

그런데 사진 뒤의 문장은 여전히 바뀌어있었다.

불태워버린다.

나는 사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정이가 집으려 하자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나는 벽에 붙은 종이를 봤다.

17:30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41분이었다.

다섯 시 반까지 열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켜자 시간이 바뀌었다.

17:27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야.”

유정과 하은의 휴대전화도 똑같았다.

17시 27분.

창밖은 여전히 새벽처럼 어두웠다.

“시간이 왜 이래?”

하은이가 창문을 바라봤다.

“고장 난 거 아니야?”

벽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틱.

틱.

틱.

분침이 조금씩 앞으로 갔다.

17시 28분.

17시 29분.

나는 종이를 뜯어 구겨버렸다.

“하지 마.”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몰랐다.

“그만해.”

벽시계의 분침이 움직였다.

17시 30분.

방 안의 불이 꺼졌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양손을 뻗었다.

왼손에 하은의 손이 잡혔다.

오른손에는 유정의 손이 닿았다.

“놓지 마.”

내가 말했다.

“절대 놓지 마.”

두 사람이 손에 힘을 주었다.

복도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딸깍.

빛 하나가 문틈 아래로 들어왔다.

또 하나.

딸깍.

딸깍.

작은 전구들이 복도를 따라 하나씩 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노래가 들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주 느린 목소리였다.

다솜.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하지 마.”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채영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지수.

세아.

보민.

사라진 다섯 친구의 목소리가 하나씩 더해졌다.

“사랑하는 윤서린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눈물이 흘렀다.

“제발 그만해.”

노래가 문 앞에서 끊겼다.

정적.

그리고 다섯 번의 노크가 들렸다.

똑.

똑.

똑.

똑.

똑.

다솜이가 문밖에서 말했다.

“서린아.”

채영이가 이어 말했다.

“이제 나와.”

지수의 목소리.

“우리 다 여기 있어.”

세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만 오면 돼.”

마지막으로 보민이가 말했다.

울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미안해.”

나는 하은과 유정의 손을 놓치지 않은 채 문을 바라봤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잠시 뒤 문밖의 다섯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이제 세 명 남았어.

그 순간 출입문을 막아둔 여행 가방이,

누군가 바깥에서 밀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방 안으로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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