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욕장의 불이 꺼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팔에 부딪혔고, 물을 밟는 소리가 났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나는 하은이 손을 찾았다.
“하은아.”
“여기 있어.”
손가락이 맞닿았다.
나는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세게 움켜쥐었다.
“다들 있어?”
유정이가 물었다.
곧 지수의 휴대전화 불빛이 켜졌다.
좁은 빛이 어둠 속을 흔들며 훑었다.
유정.
하은.
지수.
세아.
보민.
그리고 나.
여섯 명이었다.
다솜이와 채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 안에서 목소리 들었지?”
내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도 들었잖아.”
“들었어.”
보민이가 겨우 말했다.
“둘 다.”
잠긴 직원용 문은 그대로였다.
문틈도 없고 자물쇠도 걸려 있었다. 그런데 몇 초 전, 그 안에서 두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다음은 누구일까?
지수의 손전등이 문을 비췄다.
문 아래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줄기.
가느다랗게.
검은 타일 사이를 지나 우리 쪽으로 번졌다.
“나가자.”
내가 말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나가자고.”
이번에는 유정이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붙은 채 대욕장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한 번 울렸다.
쿵.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
구관 복도를 빠져나오려는데 유정이가 멈췄다.
“주인부터 찾아야 돼.”
“신고부터 하자.”
“아까 다솜이가 주인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유정을 돌아봤다.
“아직도 그걸 믿어?”
“믿는다는 게 아니라.”
“다솜이 폰이 우리한테 있었어.”
“다른 기기로 보냈을 수도 있고.”
“채영이도 없어졌어.”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제 두 명이야.”
유정이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신호가 한 칸 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지수가 내 손을 붙잡았다.
“이리 줘봐.”
“왜?”
“여긴 구관이라 신호가 약해. 창가로 가면 잡힐 수도 있어.”
“내가 갈게.”
“같이 가자.”
지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복도 끝 작은 창문으로 다가가 팔을 높이 들었다.
“여기 두 칸 뜬다.”
“그럼 바로 전화해.”
지수가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복도 안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쾅.
지수가 놀라 뒤를 돌았다.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바닥에 한 번 떨어진 뒤, 열린 대욕장 문 안쪽으로 튕겨 들어갔다.
풍덩.
얕은 온천탕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지수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갔다.
휴대전화는 검은 물 아래에서 잠시 빛나다 꺼졌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소리쳤다.
“미안해. 갑자기 소리가 나서—”
“내 폰이잖아!”
“꺼내면 될 수도 있어.”
지수가 물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건졌다.
화면은 검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젖은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지?”
말이 먼저 나왔다.
지수의 얼굴이 굳었다.
“뭐?”
“왜 네가 가져가자마자 떨어뜨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나는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솜이 없어졌고, 채영이도 없어졌어. 신고하려고 하면 계속 무슨 일이 생기잖아.”
“내가 애들 숨겼다는 거야?”
“그런 말 안 했어.”
“그런 뜻이잖아.”
지수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유정이가 우리 사이를 막았다.
“둘 다 그만해.”
나는 젖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이제 전화도 못 해.”
“내 거 쓰면 되잖아.”
지수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신호 없음이 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것도 같았다.
유정이가 말했다.
“일단 신관으로 돌아가자. 프런트 전화 쓰면 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수가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
구관과 신관을 잇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였다.
딸깍.
어디선가 전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203호였다.
우리는 애들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방에 들어서자 회색 화면이 흔들렸다.
지직.
지직.
“뭐야?”
세아가 뒤로 물러났다.
사용하지 않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다. 전원선은 벽 뒤로 이어져 있었지만 리모컨은 보이지 않았다.
화면이 몇 번 흔들리더니 영상이 나타났다.
203호였다.
어젯밤 우리가 잠든 방.
지금 우리가 있는 방.
화면은 천장 가까운 곳에서 방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덟 명이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나도 있었다.
하은이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화면 아래 날짜와 시간이 찍혀 있었다.
2026. 02. 18. 03:47
내가 깨어나기 30분 전이었다.
“누가 찍은 거야?”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듯 화면을 봤다.
“우리 방에 카메라 있었어?”
지수는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몰라.”
“네가 가져온 카메라 아니야?”
“내 카메라는 삼각대에 있었어.”
“그럼 이건 뭔데?”
지수가 화면 옆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영상 속 방은 고요했다.
가끔 누군가 뒤척였다.
바깥에서 물 흐르는 소리까지 녹음돼 있었다.
콸콸.
콸콸.
나는 화면 속 사람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분명 모두 있었다.
그때 화면 왼쪽 끝에서 다솜이가 눈을 떴다.
나는 숨을 멈췄다.
다솜이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얼굴만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자고 있었다.
다솜이는 한동안 렌즈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말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서린이한테는 말하지 마.
영상이 끊겼다.
화면이 다시 회색으로 변했다.
---
“뭘 말하지 말라는 거야?”
내 목소리가 휴게실 안에 울렸다.
친구들은 텔레비전만 바라봤다.
“다솜이가 왜 저런 말을 해?”
지수가 말했다.
“그걸 확인해봐야지.”
지수는 천장 위를 살폈다.
“선이 옆방으로 이어진 것 같아.”
“가지 마.”
내가 바로 말했다.
지수가 몸을 일으켰다.
“영상 촬영한 장치가 있을 거야.”
“주인부터 찾자고 했잖아.”
나는 지수 앞을 막았다.
“채영이도 열쇠만 찾는다고 나갔어.”
“나 혼자 안 갈게.”
지수가 유정을 봤다.
“같이 가줘.”
유정이가 움직이려 하자 나는 팔을 붙잡았다.
“안 돼.”
“바로 저기야.”
옆방 문은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문 열어놓고 갈게.”
지수가 말했다.
“여기서 다 보이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하지만 지수는 이미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진짜 잠깐이면 돼.”
문이 열렸다.
지수가 안으로 들어갔다.
유정이는 입구에 섰다.
“지수야. 보여?”
“응.”
안쪽에서 지수 목소리가 들렸다.
“장비 있어.”
“무슨 장비?”
“잠깐만.”
나는 203호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의 그림자가 문 너머 바닥으로 보였다.
휴대전화 불빛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림자는 왼쪽으로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그러다 멈췄다.
“지수야?”
대답이 없었다.
안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쾅.
유정이가 곧바로 들어갔다.
우리도 따라갔다.
203호 생각보다 휑했다.
벽.
TV.
침구.
그뿐이었다.
지수는 없었다.
“지수야!”
유정이가 화장실을 확인했다.
사람이 숨을 공간도 없었다.
바닥에 지수의 휴대전화만 떨어져 있었다.
카메라가 켜진 채였다.
지수는 카메라를 들고 화장실을 비추다가 화면 밖 무언가를 발견한 듯 멈췄다.
“채영아?”
영상 속 지수가 말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
“세 명이야.”
내가 말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이제 세 명 없어졌어.”
다솜.
채영.
지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우리 나가야 돼.”
나는 하은이 팔을 붙잡았다.
“지금.”
“응.”
하은이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가자.”
우리는 옆방을 빠져나왔다.
“잠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었다.
“왜.”
세아가 구관 복도 안쪽을 보고 있었다.
“지수 목소리.”
“아니야.”
“들렸어.”
“듣지 마.”
멀리서 누군가 불렀다.
“세아야.”
작은 목소리였다.
지수였다.
“세아야, 여기 좀 와봐.”
세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수 맞아.”
나는 세아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도와달라는 것 같아.”
“채영이도.”
지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복도 끝 세탁방 쪽이었다.
“세아야.”
그리고 아주 작게.
“나 갇혔어.”
세아가 내 손을 뿌리쳤다.
“문 앞까지만 갈게.”
“싫어.”
나는 다시 붙잡았다.
“내 말 좀 들어.”
“진짜 지수면 어떡해?”
“왜 자꾸 혼자 가!”
내가 소리쳤다.
세아는 움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안 들어가. 문만 확인할게.”
세아는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나는 따라가려 했다.
유정이가 나를 붙잡았다.
“우리는 떨어지지 말자."
우리가 뒤따라 복도로 나왔을 때 세아는 린넨실 앞에 서 있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지수야?”
세아가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세아야, 나오라고!”
나는 뛰었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쾅.
손잡이를 잡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임세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아야!”
유정이와 하은이가 함께 문을 밀었다.
보민이가 손잡이를 흔들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잠금장치는 안쪽에 있었다.
“대답해!”
나는 문을 두드렸다.
“지수랑 같이 있어?”
정적.
몇 초 뒤,
문 아래로 흰 수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수건에는 틴트로 쓴 글씨가 있었다.
네 명.
---
우리는 203호로 돌아왔다.
문을 잠갔다.
걸쇠도 걸었다.
창문도 확인했다.
남은 사람은 네 명이었다.
유정.
하은.
보민.
그리고 나.
방이 너무 넓어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어젯밤에는 여덟 명이 누워도 비좁았는데, 이제는 사람 사이로 빈 이불이 길게 드러나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혼자 가지 마.”
보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마.”
하은이가 내 옆에 앉았다.
“알았어.”
나는 세 사람을 봤다.
“너희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유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 얘기야?”
“다솜이가 영상에서 그랬잖아.”
서린이한테는 말하지 마.
“나만 모르는 게 뭐야?”
“우리도 몰라.”
“그럼 왜 아무도 신고 못 하게 해?”
“지금 프런트로 갈 수가 없잖아.”
“처음에는 갈 수 있었어.”
유정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하은이를 봤다.
“너는?”
하은이 입술이 떨렸다.
“나는 뭐.”
“진짜 아무것도 몰라?”
“응.”
“나 봐.”
하은이가 천천히 나를 봤다.
나는 그 눈을 믿고 싶었다.
그런데 하은이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왜 나 안 봐?”
“서린아.”
“너도 알고 있지?”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내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너까지 그러지 마.”
하은이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다.
“다들 그랬어.”
나는 손을 빼냈다.
“금방 온다고. 바로 앞이라고. 여기 있다고.”
그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은이는 더 이상 내 손을 잡지 않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방 한쪽의 텔레비전이 다시 켜졌다.
지직.
네 사람 모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봤던 것과 같은 회색 화면이었다.
그러다 화면에 203호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가 있는 방이었다.
촬영 위치는 천장 구석.
화면 속에서 우리는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실시간이었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화면을 봤다.
유정.
하은.
보민.
그리고 나.
네 명.
그런데 화면 오른쪽 끝.
닫힌 화장실 문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온천복을 입은 사람.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저게 누구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화장실 쪽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텔레비전을 봤다.
화면 속 사람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내 얼굴이었다.
화면 속 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카메라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화면 아래에 숫자가 나타났다.
5
방 안에는 네 명뿐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다섯 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