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용기술교육원의 유리문은 안에서만 열렸다.
이태구가 벽에 달린 호출 버튼을 누르자 잠시 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가슴에는 명찰 대신 파란색 볼펜이 꽂혀 있었다.
여자는 미달이의 얼굴과 팔을 살펴보더니 이태구에게 물었다.
“얘가 17번이에요?”
“예.”
“상태가 왜 이래요?”
“어제 다른 데서 반응 검사 좀 했습니다.”
“오늘 새 제품 넣는다고 했잖아요. 기존 약물이 남아 있으면 결과 안 맞는데.”
미달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뭘 넣는 겁니까?”
여자는 미달이의 질문을 듣지 못한 척했다.
“공복 맞아요?”
이태구가 대답했다.
“어제 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였어요.”
미달이는 깨진 도시락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차에서 밥 준다 안 했습니까?”
이태구가 미달이를 돌아보았다.
“검사 끝나고 먹으면 돼.”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습니다.”
“배고픈 게 죽을 일은 아니잖아.”
이태구는 웃으며 말했다.
미달이는 건물 뒤편에 세워진 3호차를 바라보았다.
검은 차창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동은 켜진 채였다. 배기구에서 흰 연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의 도시락을 가리켰다.
“그건 밖에 두고 들어가요.”
“제 물건입니다.”
“임상실에는 외부 물품 반입 금지예요.”
“여기 놔두면 없어질 거 아닙니까.”
“누가 도시락을 훔쳐가요?”
미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시락 뚜껑에는 금이 가 있었고, 한쪽 모서리는 깨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미달이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여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보관함에 넣어요.”
입구 옆에는 작은 철제 사물함이 놓여 있었다.
미달이는 도시락을 가장 아래 칸에 넣었다. 문을 닫기 전 뚜껑 위에 적힌 글씨를 한 번 쓰다듬었다.
박미달.
잃어버리면 허신애에게 연락할 것.
철문이 닫히며 이름이 보이지 않게 됐다.
찰칵.
여자가 열쇠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끝나면 돌려주는 거지예?”
“끝나면요.”
그 대답이 이상하게 들렸다.
끝난다는 것이 검사가 끝난다는 뜻인지, 미달이에게 남은 무언가가 끝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방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문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1실.
2실.
3실.
문틈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쪽 벽에는 전후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얼굴, 배, 허벅지, 팔뚝. 사진 속 사람들의 눈에는 모두 검은색 띠가 씌워져 있었다.
그러나 미달이는 몇몇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생활관에서 함께 밥을 먹었던 여자들이었다.
손목에 12번이 적혀 있던 여자.
버스에서 먼저 물류창고에 내렸던 여자.
그리고 맨 아래에는 멍이 든 얼굴로 누워 있는 16번의 사진이 있었다.
미달이의 걸음이 멈췄다.
사진 아래에는 날짜와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복합 앰플 3차. 반응 지연.
미달이가 사진 가까이 다가갔다.
“이 언니 어디 있습니까?”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남의 자료 보지 마요.”
“어제 쓰러진 사람입니다.”
“모르는 일이에요.”
“여기 사진이 있잖습니까.”
여자는 사진을 벽에서 떼어냈다.
“사람 잘못 봤어요.”
“얼굴에 멍 난 자리까지 똑같습니다.”
“17번.”
이태구가 뒤에서 불렀다.
“말 많아지면 검사 시간만 길어져.”
미달이는 사진을 쥔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종이 아래쪽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검은색 펜으로 여러 번 덧칠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성 하나는 보였다.
최.
“16번 언니 성이 최 씨입니까?”
여자의 손이 멈췄다.
이태구가 미달이의 어깨를 잡았다.
“들어가.”
“이름이 뭡니까?”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죽을 애 이름 알아서 뭐 하냐면서예.”
미달이가 이태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고 나면 이름도 없애는 겁니까?”
이태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미달이는 아픈 어깨를 빼내려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서도 신애처럼 굴 거야?”
신애의 이름이 나오자 미달이의 얼굴이 굳었다.
“신애한테 뭔 짓 했습니까?”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이소.”
“그럼 조용히 해.”
이태구가 미달이의 귀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
“너 하나 때문에 친구까지 영주에서 살기 힘들게 만들지 말고.”
미달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겁을 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신애가 걱정됐다.
골목 바닥에 넘어졌던 모습이 떠올랐다. 승합차를 따라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미달이는 더 묻지 않았다.
흰 가운의 여자는 미달이를 5실로 데려갔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와 금속 선반,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둥근 촬영용 조명이 달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준비돼 있었다.
임상 체험 자발적 참여 동의서.
미달이는 서류 첫 줄을 읽었다.
“자발적 참여가 뭡니까?”
“본인이 동의해서 검사받는다는 뜻이에요.”
“동의 안 합니다.”
여자가 볼펜을 내밀었다.
“서명하세요.”
“싫습니다.”
“이미 근로계약서에 포괄 동의했어요.”
“그 계약서도 사기였습니다.”
“그건 우리하고 상관없어요.”
“상관없으면 나 보내주이소.”
여자는 이태구를 바라보았다.
이태구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미달이가 삼우인력개발 사무실에서 쓴 계약서의 마지막 장이었다.
아래에는 미달이의 서명이 있었다.
이태구는 서명 부분을 카메라폰으로 찍었다.
“뭐 하는 겁니까?”
“확인하는 거야.”
그는 촬영한 화면을 흰 가운의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여자는 동의서 서명란 아래에 종이를 대고 미달이의 서명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박.
미.
달.
“그거 위조 아입니까?”
미달이가 말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본인 서명 맞잖아요.”
“내가 지금 안 한다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전에 한다고 했잖아요.”
“전에 한 말이 오늘까지 따라옵니까?”
“계약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미달이는 그들의 손에서 자신의 이름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쓰지 않아도 박미달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발적이라고 기록됐다.
자신이 아프다고 말해도 이상이 없었다고 적힐 것이었다.
이곳에서 미달이의 말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이름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흰 가운의 여자가 동의서를 서류철에 꽂았다.
“옷 갈아입어요.”
직원이 가져온 것은 얇은 반소매 환자복이었다.
미달이는 옷을 받아 들고 물었다.
“무슨 제품인지부터 말해주이소.”
여자는 금속 선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정식 제품명이나 제조사 이름이 없었다.
흰색 스티커 위에 검은 글씨만 인쇄돼 있었다.
CW-04.
“이게 뭡니까?”
“복합 영양 주사예요.”
“성분은예?”
“비타민하고 아미노산.”
“그라모 와 제품 이름도 없습니까?”
“출시 전이라 그래요.”
여자는 작은 유리병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병 안의 액체는 완전히 투명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흰 가루 같은 것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쥐한테는 검사했습니까?”
미달이가 물었다.
여자가 웃었다.
“쥐보다 사람이 정확하지.”
그 말에 방 안의 직원도 작게 웃었다.
미달이만 웃지 않았다.
“사람한테 처음 넣는 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대 옆 기계가 켜졌다.
화면에는 맥박과 혈압을 표시하는 숫자가 나타났다.
직원이 미달이의 팔에 혈압계를 감았다.
“누워요.”
미달이는 침대에 앉았지만 눕지 않았다.
“끝나면 진짜 보내주는 거 맞습니까?”
이태구가 말했다.
“약속했잖아.”
“신애한테도 연락하게 해주고예?”
“그래.”
“내 휴대전화도 돌려주고?”
“그래.”
“진주 가는 차비도예?”
“다 준다고.”
미달이는 이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떠올리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주행이라고 적힌 전광판.
익숙한 터미널 냄새.
버스에서 내리면 보일 어머니의 얼굴.
영주에서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던 말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하면 어머니는 뭐라고 할까.
미달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화를 내는 일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실망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저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실장님.”
“왜.”
“내려가면예.”
미달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엄마한테 영주 별거 없더라, 그리 말할랍니다.”
이태구가 피식 웃었다.
“끝나고 직접 말해.”
미달이는 침대에 누웠다.
직원이 오른팔을 침대 옆 받침대에 올려놓고 밴드로 손목을 고정했다.
“이건 와 묶습니까?”
“갑자기 움직이면 바늘 빠져요.”
“안 움직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왼쪽 손목에도 밴드가 감겼다.
미달이는 양팔을 벌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둥근 조명이 켜졌다.
눈이 부셨다.
흰 가운의 여자가 주사기에 유리병 속 액체를 담았다.
“용량 얼마로 할까요?”
직원이 물었다.
여자는 서류를 확인했다.
“첫 투여는 20.”
이태구가 말했다.
“오늘 오후에 사람들 와서 봐야 되니까 확실히 효과 나오게 해주세요.”
“20도 처음인데요.”
“젊어서 괜찮습니다.”
“지난번 16번도 젊었어요.”
미달이는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에 뭐가 있었습니까?”
여자는 이태구를 노려보았다.
이태구가 말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요.”
“16번한테도 이거 넣었습니까?”
“가만히 있어요.”
“그 언니 죽었습니까?”
직원이 미달이의 팔을 눌렀다.
“움직이지 마세요.”
“대답하이소!”
미달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양손의 밴드가 손목을 조였다.
이태구가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죽었든 살았든 너랑 상관없어.”
“상관있습니다.”
“왜?”
“그 언니가 내한테 말해줬습니다.”
미달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기다리는 사람 먼저 포기하게 만드는 게 여기 일이라고.”
이태구가 미달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잘 배웠네.”
그는 미달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러 침대에 눕혔다.
“네 친구도 곧 포기할 거야.”
미달이의 눈빛이 변했다.
“신애는 안 그럽니다.”
“얼마나 안 그럴 것 같아?”
“평생.”
“사람이 평생 남 하나 기다릴 것 같아?”
“신애는 그럴 아입니다.”
“그럼 시험해보든가.”
주삿바늘이 팔 안쪽으로 들어왔다.
따끔한 통증이 지나간 뒤 차가운 액체가 천천히 혈관으로 밀려들었다.
미달이는 이를 악물었다.
처음 몇 초 동안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잠시 뒤 목구멍 안쪽이 간지러웠다.
기침을 하려 했지만 목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혀끝이 저렸다.
귀 안쪽에서는 멀리서 파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목이 이상합니다.”
미달이가 말했다.
흰 가운의 여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투여 후 십오 초. 인후부 불편감.”
직원이 기록지에 적었다.
“주사 빼주이소.”
“조금만 더 볼게요.”
“입 안이 붓는 것 같습니다.”
“호흡은 가능하죠?”
“안 된다 카잖습니까.”
미달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가슴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목 가운데에 딱딱한 돌이 걸린 것 같았다.
기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화면의 맥박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112.
113.
114.
“맥박 너무 빠른데요.”
직원이 말했다.
흰 가운의 여자는 주사액이 남은 양을 확인했다.
“절반도 안 들어갔어.”
“중단할까요?”
이태구가 대답했다.
“효과 나올 만큼은 넣어야죠.”
미달이의 눈이 커졌다.
“그만하이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장님.”
이태구는 미달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참아.”
“숨을…… 못 쉬겠습니다.”
“네가 긴장해서 그래.”
“죽을 것 같습니다.”
미달이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태구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주사기를 바라보았다.
“아직 젊잖아.”
약물이 조금 더 들어왔다.
그 순간 미달이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귀 안의 파도 소리가 커졌다.
천장의 조명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도 흐릿해졌다.
기계의 경고음만 또렷했다.
삐삐삐삐삐.
“산소포화도 떨어져요.”
“주사 빼.”
“아까 빼자고 했잖아요!”
“산소 가져와.”
누군가 바늘을 뺐다.
다른 누군가는 미달이의 환자복 단추를 풀었다.
차가운 패드가 가슴에 붙었다.
“119 부를까요?”
직원이 물었다.
이태구가 즉시 대답했다.
“안 돼.”
“기도가 붓고 있어요.”
“3호차 불러.”
“차 타고 버틸 상태가 아닌데요.”
“여기서 신고 들어오면 다 끝나요.”
목소리들이 멀어졌다.
미달이는 입을 벌려 숨을 쉬려고 했다.
공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만 들썩였다.
머릿속에는 신애의 된장찌개 냄새가 떠올랐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던 냄비.
노란 도시락 속 계란말이.
자신의 이름을 좋은 이름이라고 말해준 목소리.
‘돈 말고 그냥 와.’
미달이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밴드에 묶인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신애…….”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직원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미달이는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신애한테…….”
이태구가 직원의 어깨를 밀어냈다.
“말시키지 마.”
이태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런 애들은 쉽게 안 죽어.”
그 말이 끝난 순간 미달이의 몸이 크게 떨렸다.
화면의 맥박 숫자가 갑자기 내려갔다.
141.
142.
143.
144.
기계에서 길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삐――.
“맥박 잡아봐요!”
직원이 미달이의 목을 짚었다.
흰 가운의 여자가 가슴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미달이의 몸이 누를 때마다 침대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차 준비됐습니다!”
복도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맥박은요?”
“희미해요.”
“그럼 빨리 옮겨.”
미달이는 침대 시트째 들려 나갔다.
복도의 조명들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1실.
2실.
3실.
벽에 붙은 체험자 사진들.
자신의 얼굴도 언젠가 저곳에 붙을 것 같았다.
눈에는 검은 띠가 씌워지고, 이름 대신 번호만 남을 것이다.
건물 뒤편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미달이의 얼굴에 닿았다.
3호차의 문이 열려 있었다.
차 안에는 좌석이 없었다.
대신 양쪽 벽에 긴 의자가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얼룩진 담요와 산소통이 놓여 있었다.
미달이는 바닥에 눕혀졌다.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의자 아래에서 노란색 물건 하나가 보였다.
칫솔이었다.
생활관 화장실에서 관리자가 버렸던 노란 칫솔.
그 옆에는 여자용 운동화 한 짝이 놓여 있었다.
16번의 침대 아래에 있던 것과 같은 운동화였다.
“출발해요!”
차문이 닫혔다.
안이 어두워졌다.
3호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원이 미달이의 코에 산소관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어느 병원으로 가요?”
앞에서 운전기사가 물었다.
대답은 이태구가 했다.
그도 차에 올라타 있었다.
“병원 안 간다니까.”
“얘는 진짜 위험해 보이는데요.”
“조금 돌다 보면 약 빠져.”
“안 빠지면요?”
이태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차가 큰길로 진입하며 속도를 높였다.
“응급실 앞에 내려놓으면 돼.”
“신분증은요?”
“없애.”
“휴대전화는?”
“초기화하고.”
“생활관 기록은요?”
“오늘 퇴소한 걸로 정리해.”
미달이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천장의 작은 조명이 보였다.
차는 병원을 향해 달리지 않았다.
한강을 건넜다가 터널로 들어갔고, 다시 높은 건물 사이를 돌았다. 창문 틈으로 같은 간판이 두 번 지나갔다.
3호차는 영주를 빙빙 돌고 있었다.
미달이가 살아나는지 기다리면서.
아니면 죽는지 기다리면서.
직원이 물었다.
“친구가 신고했다던데 괜찮겠어요?”
이태구가 대답했다.
“증거가 없잖아.”
“생활관까지 찾아왔다면서요.”
“오늘부터 거기 없는 사람이야.”
미달이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깨진 도시락 안에 넣지는 못했지만, 임상실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종이 한 장을 환자복 소매 안에 숨겨두고 있었다.
주사를 맞기 직전 침대 밑으로 떨어졌던 기록지였다.
미달이는 직원들이 자신의 맥박을 확인하는 사이 종이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검사 결과가 적혀 있었다.
체험 번호 17.
특이 반응 없음.
이상 없음.
검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작성된 결과였다.
미달이는 소매 안의 종이를 손끝으로 움켜쥐었다.
그것만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면.
신애에게 닿게 할 수만 있다면.
3호차가 신호를 기다리며 멈췄다.
바깥에서 횡단보도 안내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영주 한복판이었다.
수십 명이 바로 옆을 지나고 있었다.
미달이는 마지막 힘을 모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이 차문 아래쪽에 닿았다.
그녀는 소매 안의 기록지를 꺼냈다.
그러나 종이를 문틈으로 밀어 넣으려는 순간, 이태구가 미달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미달이의 손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이태구는 그것을 주워 펼쳤다.
체험 번호 17.
이상 없음.
그의 눈이 미달이에게 향했다.
“이걸로 뭐하려고?”
미달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태구는 웃으며 기록지를 천천히 반으로 찢었다.
다시 반으로.
잘게 찢어진 종이 조각이 차 바닥에 떨어졌다.
“증거 남기려고 했어?”
그가 미달이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미달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신애…….”
이태구는 웃지 않았다.
미달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찾습니다.”
“뭘 믿고?”
“내 이름을 아니까예.”
이태구의 얼굴이 굳었다.
미달이는 끊어지는 숨 사이로 말했다.
“니들은 번호만 알지만.”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신애는 내 이름 압니다.”
그 순간 3호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태구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을 발로 밟았다.
그러나 가장 작은 조각 하나가 그의 구두 밑에서 빠져나와 미달의 손 가까이 미끄러졌다.
그 조각에는 누군지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체험 번호 17.
이상 없음.
미달은 손가락을 움직여 종이 조각을 손바닥 안에 숨겼다.
이태구는 보지 못했다.
앞자리에서 운전기사가 물었다.
“어디까지 돌까요?”
이태구가 미달의 희미한 숨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살아나면 생활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안 살아나면 양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