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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셔틀

박미달전: 집으로 가는 길 · 5화

미달이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신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승합차가 출발할 때까지 골목에 서 있던 모습. 매일 전화하라고 했던 목소리. 돈 말고 그냥 돌아오라던 말.

미달이는 베개 밑에 숨겨둔 노란 도시락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플라스틱 뚜껑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박미달.

잃어버리면 허신애에게 연락할 것.

그 글씨를 보고 있으면 아직 자신에게 이름이 있는 것 같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1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고, 관리자는 미달이를 17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도시락에는 분명 박미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름다울 미.

통달할 달.

신애가 좋은 이름이라고 말해준 이름이었다.

“안 자?”

맞은편 침대의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식당에서 말을 걸었던 여자였다. 얼굴 한쪽에 노란 멍이 든 채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었다.

“잠이 안 옵니다.”

“내일 되면 잘 자게 돼.”

“와예?”

“기절하듯 자니까.”

미달이는 도시락을 다시 베개 밑에 넣었다.

“언니는 이름이 뭡니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박미달입니다.”

“여기서는 이름 말하지 마.”

“와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 정든다고 싫어해.”

“누가예?”

여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모서리에는 작은 검은 구멍이 있었다. 카메라인지, 오래된 못 자국인지 알 수 없었다.

“관리자도 그렇고 실장도.”

여자가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목에는 검은색 유성펜으로 숫자 16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는 이걸로 불러.”

“그라모 계속 16번으로 살 겁니까?”

“나갈 때까지.”

“언제 나가는데예?”

“돈 다 갚으면.”

“언니도 빚이 있습니까?”

16번이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이십만 원이었어.”

“지금은예?”

“지난달에 확인했을 때 천사백.”

미달이가 몸을 일으켰다.

“일을 했는데 빚이 늘었다고예?”

“숙박비.”

“기숙사 무료라 했잖습니까.”

“기본 침대만 무료야. 이불 사용료, 세탁비, 난방비는 따로.”

16번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식비, 셔틀비, 관리비, 휴대전화 보관비. 현장에서 실수하면 손해배상. 아프다고 쉬면 대체 인력 비용.”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아예.”

16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달이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잠근 문.

나사로 고정된 창문.

신호음이 들리지 않는 공용전화.

“아무도 신고 안 했습니까?”

“했겠지.”

“그라모 경찰이 왔을 거 아닙니까.”

“왔었어.”

미달이가 16번을 바라보았다.

“한 번은.”

16번이 말했다.

“그때 관리자가 문 다 열어놓고 휴대전화도 돌려줬어. 외출 자유롭고, 다들 자발적으로 숙소에 있는 거라고 말하라고 했지.”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전부.”

“와예?”

“경찰 돌아가고 나면 누가 신고했는지 찾으니까.”

16번은 멍든 뺨을 손으로 감쌌다.

“가족 주소도 다 알고 있고.”

미달이의 몸이 굳었다.

집 주소.

계약서 첫 장에 적혀 있던 나의 어머니의 집.

“가족한테 뭘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해.”

16번은 조용히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걸 아니까 더 무서운 거야.”

복도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관리자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방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짤랑.

짤랑.

발소리가 멀어진 뒤 16번이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내일 말 많이 하지 마.”

“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다들 처음에는 그래.”

“저는 다릅니다.”

“뭐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16번의 어깨가 잠시 움직였다.

“여기 있는 애들도 다 있었어.”

미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6번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포기하게 만드는 게 여기 일이야.”

새벽 다섯 시 정각.

복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종은 여자들이 모두 일어날 때까지 계속 울렸다.

“기상! 기상!”

관리자가 방마다 문을 열며 소리쳤다.

“세면 십 분! 침구 정리하고 번호대로 내려와요!”

미달이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은 한 층에 하나뿐이었다. 여자 열두 명이 세면대 두 개와 변기 두 칸을 함께 사용했다.

미달이가 세수를 하려 하자 관리자가 문밖에서 말했다.

“수도 사용 삼 분 넘으면 추가 비용이에요.”

“물 쓰는 것도 돈 냅니까?”

“기본 사용량만 무료.”

미달이는 물을 잠갔다.

세면대 위 거울에는 여자들의 얼굴이 줄지어 비쳤다.

누군가는 한쪽 눈이 부어 있었고, 누군가는 입술이 터져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서로의 상처를 묻지 않았다.

미달이는 거울 속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칫솔꽂이에 칫솔은 열세 개가 꽂혀 있었다.

생활관에 있는 사람은 열두 명이었다.

“이건 누구 겁니까?”

미달이가 노란색 칫솔을 가리켰다.

옆에서 이를 닦던 16번의 손이 멈췄다.

관리자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준비해요.”

“사람 수보다 칫솔이 하나 많은데예.”

관리자는 노란 칫솔을 뽑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퇴소한 사람 거예요.”

“언제 나갔는데예?”

“17번.”

관리자의 눈이 미달이에게 향했다.

“질문 하나 할 때마다 교육비 붙일까요?”

미달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침 식사는 어제 저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찬밥 한 덩이.

삶은 달걀 반쪽.

소금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콩나물국.

관리자는 식당 입구에서 여자들의 손목에 번호를 적었다. 미달이의 차례가 되자 검은 유성펜으로 17을 썼다.

“이거 안 쓰면 안 됩니까?”

“현장에서 구분해야 해요.”

“이름 부르면 되잖아예.”

관리자는 펜촉으로 미달이의 손목을 눌렀다.

“여기서는 이름 안 써요.”

숫자가 피부에 진하게 남았다.

미달이는 손목을 문질렀다.

잉크가 번져 주변이 검게 얼룩질 뿐 숫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여자들은 현관 앞에 번호순으로 줄을 섰다.

밖에는 검은색 셔틀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탔던 승합차보다 큰 차였다. 창문은 모두 검게 칠해져 있었고, 앞유리에도 회사 이름이나 노선 표시가 없었다.

버스 좌석에는 흰색 테이프로 숫자가 붙어 있었다.

미달이는 17번 좌석에 앉았다.

옆자리는 16번이었다.

“이렇게 번호까지 정해놓는 이유가 뭡니까?”

미달이가 속삭였다.

“잘못 내리지 말라고.”

“셔틀이 여러 군데 갑니까?”

“응.”

16번은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첫 번째는 물류창고. 두 번째는 체험장. 세 번째는 시술소.”

“하루에 세 군데를 다 갑니까?”

“그 셔틀 말고.”

16번이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차가 하루에 세 번 돌아.”

“아침에 나가는 차, 저녁에 들어오는 차.”

16번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리고 아픈 애 데려가는 차.”

미달이는 어제 밤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루타로 쓰기 좋을 것 같다는 관리자의 목소리.

“병원 가는 차입니까?”

16번은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아침의 영주는 어제와 똑같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횡단보도에 줄을 섰고, 카페 앞에는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학생들은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검은 창문 밖으로는 평범한 하루가 흘러갔다.

미달이는 손바닥을 창문에 댔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유리 한 장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깥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스는 먼저 대형 물류창고에 여자 네 명을 내려주었다.

다음으로 마사지 체험장에 세 명이 내렸다.

마지막으로 미달이와 16번을 포함한 다섯 명이 강남의 한 건물 지하에 도착했다.

간판은 없었다.

미달이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여기 전에 갔던 데랑 비슷한데예.”

16번이 대답했다.

“다 비슷해.”

지하 문을 열자 소독약 냄새가 밀려 나왔다.

안쪽에는 침대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침대마다 커튼이 달려 있었고, 벽 한쪽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류를 확인했다.

“16번은 어제 하던 거 계속하고.”

그녀의 손가락이 명단 아래로 내려갔다.

“17번은 신규 앰플 반응 테스트.”

미달이가 곧바로 말했다.

“저는 시술 안 받는다고 하고 왔습니다.”

흰 가운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그래요?”

“이태구 실장님이예.”

“서류에는 체험 인력이라고 돼 있는데.”

“생활용품 관리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앰플도 생활용품이지.”

“사람 몸에 주사로 넣는 게 무슨 생활용품입니까?”

흰 가운의 여자는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얘 교육 안 됐어?”

직원이 미달이의 팔을 잡았다.

미달이는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마이소.”

“17번, 안쪽으로 들어가요.”

“싫습니다.”

“근무 거부하면 비용 차감돼요.”

“차감하든가 말든가. 내 집에 갈랍니다.”

미달이는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는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삼우인력개발 사무실에서 신애의 앞을 막았던 남자였다.

그가 문손잡이 앞에서 팔짱을 꼈다.

“비키이소.”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 가둬놓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미달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커튼 안에 있던 여자들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 곧 다시 숨었다.

흰 가운의 여자는 계산서 한 장을 꺼냈다.

“박미달 씨.”

처음으로 누군가 미달이의 이름을 불렀다.

미달이는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제 입소하면서 발생한 비용 확인할게요.”

여자가 항목을 읽었다.

“입소 관리비 이십만 원. 침구 보증금 십오만 원. 생활복 대여비 십만 원. 휴대전화 보관비 오만 원.”

“잠시만예.”

“전날 현장 취소 위약금 십오만 원. 기존 교육비 삼십만 원. 총 구십오만 원.”

미달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기숙사비도 없고 수수료도 없다 했습니다.”

“기숙사비는 없어요.”

“그라모 이불 덮고 자는 돈은 따로 냅니까?”

“규정이에요.”

“휴대전화는 지들이 뺏어놓고 보관비를 와 내가 냅니까?”

“물건을 맡겼잖아요.”

미달이는 기가 막혀 웃었다.

“그라모 내가 지금 일 안 하고 나가면 어찌 됩니까?”

“퇴소 정산하고 가시면 돼요.”

“얼만데예?”

여자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계약 해지 위약금까지 백이십만 원.”

“내가 영주 와서 받은 돈이 이십만 원인데, 빚은 와 백이십만 원입니까?”

“그건 본인이 계산을 잘못한 거죠.”

미달이는 명단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박미달.

그 옆에 괄호가 있었다.

17번.

미달이는 종이를 낚아채려 했다.

직원이 먼저 서류를 치웠다.

“누워요.”

“싫다 안 합니까.”

“오늘 일당 십팔만 원이에요.”

“거기서 또 떼갈 거 아닙니까?”

“규정대로 정산합니다.”

“다 떼고 나면 얼맙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달이는 출입문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달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문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아도 미달이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미달이는 결국 침대 쪽으로 돌아섰다.

16번이 커튼 안에서 미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이미 수없이 본 장면인 듯했다.

미달이는 침대에 누웠다.

흰 가운의 여자가 팔 안쪽을 소독했다.

“뭘 넣는 겁니까?”

“피로 회복 앰플.”

“성분은예?”

“설명해도 몰라요.”

“이름이라도 말해주이소.”

“17번.”

여자가 미달이의 팔을 침대에 눌렀다.

“질문이 너무 많아요.”

바늘이 팔 안쪽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따라 올라왔다.

처음에는 팔이 저렸다.

잠시 뒤 혀끝에 금속 맛이 났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만예.”

미달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상합니다.”

“긴장해서 그래요.”

“심장이 너무 빨리 뜁니다.”

흰 가운의 여자는 시계를 보며 주사액이 들어가는 속도를 확인했다.

“정상 반응이에요.”

“숨이 잘 안 쉬어집니다.”

“천천히 쉬어요.”

“주사 빼주이소.”

“거의 다 들어갔어요.”

미달이는 반대편 손으로 주삿줄을 잡으려 했다.

직원이 손목을 붙들었다.

“가만히 있어요.”

“놓으라!”

미달이가 몸을 일으키자 주삿바늘이 피부 안에서 움직였다. 팔 안쪽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그 순간 맞은편 커튼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쿵.

직원들이 16번 쪽으로 달려갔다.

16번은 침대 옆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고,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16번!”

직원이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눈 떠봐요.”

16번은 대답하지 않았다.

“혈압 안 잡혀요.”

“산소부터 줘.”

“119 부를까요?”

그 말이 나오자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안 돼.”

“그럼 어떡해요?”

“생활관에 연락해. 차 보내라고 해.”

직원이 전화를 걸었다.

“16번 이상 반응 왔어요.”

잠시 뒤 직원이 말했다.

“예. 세 번째로요.”

미달이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팔에는 아직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병원 안 데려갑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 쓰러졌잖아예!”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에게 다가왔다.

“17번은 누워 있어요.”

“119 부르이소.”

“우리가 알아서 해요.”

“뭘 알아서 합니까? 숨도 못 쉬잖아예!”

미달이가 휴대전화를 찾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위에 유선전화가 있었다.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문 앞의 남자가 미달이의 팔을 붙잡았다.

주삿바늘이 빠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놔라!”

미달이는 남자의 손등을 긁었다.

남자가 미달이를 벽 쪽으로 밀쳤다.

등이 벽에 부딪혔다.

순간 숨이 막혔다.

남자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미달이가 움직일 수 없도록 어깨를 눌렀다.

“경찰 부를 기다!”

미달이가 소리쳤다.

“사람 죽일라 카는 거 다 봤다!”

흰 가운의 여자는 미달이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17번 진정제 준비해요.”

미달이의 몸이 굳었다.

직원이 새로운 주사기를 꺼냈다.

그때 건물 뒤편에서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16번은 담요에 감긴 채 밖으로 옮겨졌다.

미달이가 소리쳤다.

“언니!”

16번의 눈이 아주 조금 떠졌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미달이 쪽을 향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달이는 그 모양을 알아보았다.

세 번째.

문이 닫혔다.

잠시 뒤 셔틀버스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 앞에 섰다.

“계속할까요?”

손에는 진정제가 든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아니면 얌전히 일할래요?”

미달이는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팔에서는 피가 흘렀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미달이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뭐라고요?”

흰 가운의 여자가 물었다.

미달이는 입 안의 피 맛을 삼켰다.

“일한다고예.”

그날 미달이는 여섯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쪽 팔에 앰플을 맞고, 다른 팔에는 패치를 붙였다. 얼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크림을 발랐고, 허벅지에는 전기 자극기를 연결했다.

중간마다 직원들이 피부색과 맥박, 체온을 기록했다.

기록지에는 미달이의 이름 대신 숫자가 적혔다.

실험 대상 17.

오후가 되자 중년 여자들이 체험장에 들어왔다.

흰 가운의 여자는 미달이를 의자에 앉혀놓고 말했다.

“이분은 오늘 처음 앰플을 맞은 체험자예요. 얼굴빛이 맑아진 것 보이시죠?”

여자 한 명이 미달이에게 물었다.

“안 아팠어요?”

미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흰 가운의 여자가 미달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직접 말씀해보세요.”

미달이는 파랗게 질린 16번의 입술을 떠올렸다.

담요에 감겨 세 번째 셔틀에 실려 가던 모습.

“아가씨.”

중년 여자가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미달이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프지는 않았고요?”

미달이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숫자 17이 땀에 번져 있었다.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안 아팠습니다.”

중년 여자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상담실에 들어갔다.

미달이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삼켰다.

아프지 않았다.

괜찮았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때마다 누군가는 돈을 냈고, 이태구 실장은 돈을 벌었고, 미달이의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후 늦게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미달이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주위를 살폈다.

세면대 옆에는 청소용 펜과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미달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쪽에는 진주에서 영주로 올라올 때 탔던 고속버스 승차권이 접혀 있었다.

진주 → 영주경부

출발 시각과 좌석 번호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미달이는 승차권 뒷면에 펜으로 적었다.

청운생활관. 독산동 공장 근처. 회색 건물. 창문 막힘.

정확한 주소는 몰랐다.

셔틀버스에서 본 것들을 떠올리며 글을 더 적었다.

아침에 물류창고 지나감. 강남 지하 시술소.

마지막에는 크게 썼다.

허신애에게.

미달이는 승차권을 네 번 접었다.

도시락 안에 숨기려고 했지만 도시락은 생활관에 있었다.

그녀는 승차권을 양말 안쪽에 넣었다.

화장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17번.”

직원의 목소리였다.

“뭐 해요?”

“배가 아파예.”

“문 열어요.”

“쪼매만 기다리이소.”

“지금 안 열면 관리자 부릅니다.”

미달이는 지갑을 가방에 넣고 물을 내렸다.

문을 열자 직원이 미달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설사합니다.”

직원은 화장실 안을 확인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세면대 아래까지 살폈다.

미달이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양말 속 승차권이 바스락거렸다.

직원이 미달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머니 보여줘요.”

미달이는 주머니를 뒤집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직원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달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음부터 화장실도 허락받고 가요.”

“똥 누는 것도 허락받아야 됩니까?”

“비용 추가할까요?”

미달이는 입을 다물었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두 번째 셔틀이 도착했다.

미달이는 17번 좌석에 혼자 앉았다.

옆의 16번 좌석은 비어 있었다.

버스 안의 누구도 16번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

미달이는 빈 좌석을 바라보다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16번 언니는예?”

“몰라요.”

“병원 갔습니까?”

“관리자한테 물어봐요.”

“어느 병원인데예?”

운전기사는 음악 소리를 키웠다.

생활관에 돌아오자 관리자는 출석 명단을 확인했다.

“12번.”

“예.”

“13번.”

“예.”

“14번.”

“예.”

숫자는 15번 다음 곧바로 17번으로 넘어갔다.

“17번.”

미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리자가 고개를 들었다.

“17번.”

“박미달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관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요?”

“제 이름 박미달이라고예.”

미달이는 손목에 적힌 숫자를 소매로 가렸다.

“번호 말고 이름으로 부르이소.”

관리자는 명단을 덮었다.

“생활관에서는 규칙 따라요.”

“16번은 어디 갔습니까?”

“퇴소했어요.”

“어디로예?”

“개인 사정으로 퇴소했다고요.”

“아파서 실려 갔잖습니까.”

“17번이 잘못 봤겠죠.”

“내 눈앞에서 쓰러졌습니다.”

관리자가 미달이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다른 사람 일에 관심 갖지 마요.”

“죽었습니까?”

식당 안의 여자들이 숨을 죽였다.

미달이가 다시 물었다.

“16번 언니 죽었습니까?”

관리자는 미달이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대신 명단 아래에 무언가를 적었다.

17번. 규칙 위반. 관리비 10만 원 추가.

“방으로 올라가요.”

“대답하이소.”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하니까.”

“세 번째 셔틀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관리자의 펜이 멈췄다.

잠시 뒤 그녀가 미달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직접 타보면 알겠죠.”

미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4층 방으로 돌아왔을 때 16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짐은 그대로였다.

베개 옆에는 접어둔 잠옷이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낡은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세면 가방과 지갑도 사물함 안에 남아 있었다.

자진해서 나간 사람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미달이는 16번의 매트리스를 들었다.

침대 바닥에 검은 볼펜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차는 병원에 안 간다.

그 아래에는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8, 11, 16.

복도에서 열쇠 소리가 들렸다.

미달이는 급히 매트리스를 내려놓았다.

관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와 빈 침대를 확인했다.

“내일 새 사람 들어오니까 16번 짐 버려요.”

“이름이 뭐였습니까?”

미달이가 물었다.

관리자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누구요?”

“16번 언니예.”

“번호만 알면 됐지, 이름을 알아서 뭐 하게요?”

관리자가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바깥에서 문이 잠겼다.

찰칵.

미달이는 베개 밑에서 노란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 뚜껑에 적힌 신애의 글씨를 내려다보며 양말 속 승차권을 꺼냈다.

그녀는 승차권을 도시락 바닥에 넣고 그 위에 뚜껑을 닫았다.

잃어버리면 허신애에게 연락할 것.

미달이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누르며 속삭였다.

“신애야.”

목소리가 떨렸다.

“내 길 잃었다.”

그때 복도에서 관리자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렸다.

“예, 실장님.”

미달이는 도시락을 품에 안은 채 문 가까이 다가갔다.

“16번은 정리됐습니다.”

관리자가 말했다.

“예. 물건은 내일 버리고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17번이 자꾸 캐묻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태구 실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관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기 직전, 마지막 말이 들렸다.

“내일 17번도 삼번 셔틀에 태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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