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미달이는 건물 맞은편 골목에 숨어 삼우인력개발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신애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일곱 시까지 오라며.”
“응.”
“그럼 들어가자.”
“쪼매만 기다려봐라.”
“뭘 기다려?”
미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무실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이태구 실장은 이미 출근한 듯했다. 건물 앞에는 어제 탔던 검은 승합차도 세워져 있었다.
미달이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오른쪽 뺨의 붓기는 어제보다 조금 가라앉았지만, 멍은 턱 아래까지 퍼져 있었다. 신애가 붙여준 거즈는 후드티 안쪽에 가려져 있었다.
“신애야.”
“응.”
“니는 그냥 가라.”
신애가 미달이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내 혼자 이야기해볼게.”
“계약서 보여달라고 하고, 카메라폰으로 장마다 찍고, 돈 떼간 내역도 받아야 돼.”
“알았다.”
“그리고 오늘 일 안 한다고 해.”
“그것도 알았다.”
“안다고만 하지 말고.”
미달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니가 옆에 있으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저 사람들 성질 더러울 수도 있잖아.”
“그래서 같이 온 거야.”
“내 일이다.”
“네 일이니까 네 친구가 온 거지.”
신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미달이는 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밤새 둘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신애는 경찰에 가자고 했고, 미달이는 계약서도 없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느냐고 버텼다. 몰래 찍힌 사진과 문자가 있지 않느냐고 해도 미달이는 선뜻 신고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신고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
그럼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진주에 있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돈을 보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했던 자신의 말이 전부 거짓이 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신애가 먼저 길을 건넜다.
“가자.”
“잠시만.”
“늦으면 오만 원 떼간다며.”
미달이는 신애의 뒤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고장 나 있었다.
4층까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뒤꿈치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신애가 미달이의 걸음이 느려진 것을 눈치채고 속도를 맞췄다.
사무실 문을 열자 담배 냄새가 밀려 나왔다.
이태구 실장은 책상 앞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는 신애를 보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누구야?”
신애가 먼저 대답했다.
“미달이 룸메이트인데요.”
“외부인 들어오는 데 아닌데.”
“계약서 확인하러 왔어요.”
이 실장이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미달 씨가 계약했는데 왜 친구가 확인해?”
“제가 보여달라 했는데 안 보여줬잖아예.”
“회사 보관용이라고 설명했을 텐데.”
“근로계약서는 근로자도 한 부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신애가 말했다.
이태구 실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직원도 아닌 사람이 와서 회사 규정 운운하는 건 좀 그렇네.”
“직원이 아니라면서 왜 출퇴근 시간 정하고, 지각비 떼고, 일을 시켜요?”
“우리는 현장을 연결해주는 곳이에요.”
“그럼 일용직 계약서라도 줘야죠.”
이 실장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미달이는 신애의 소매를 잡았다.
“신애야, 그만해라.”
“뭘 그만해.”
“내가 이야기할게.”
신애는 미달이를 바라보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달이는 이태구 실장 앞에 섰다.
“실장님.”
“말해.”
“계약서 보여주이소. 어제 떼간 돈도 뭐 때문에 떼간 건지 적어서 주시고예.”
“그래서?”
“오늘은 병원부터 가야겠습니다.”
“현장은?”
“못 갑니다.”
이태구 실장이 컵라면 뚜껑을 덮었다.
“그럼 대체 인력 비용 십오만 원.”
“그거 계약서에 있는지 확인할랍니다.”
“있으면 낼 거야?”
미달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실장은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좋아. 보여줄게.”
그는 여러 장의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첫 장에는 미달이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진주 본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분명 미달이의 서명이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이 많았다.
현장 취소 시 대체 인력 비용 청구.
업무 중 발생한 교통비와 의상비 개인 부담.
시술 및 제품 체험으로 인한 이상 반응은 개인의 특이체질로 간주.
계약 기간 내 퇴사할 경우 교육비와 관리비 정산.
미달이는 종이를 넘길수록 얼굴이 굳었다.
“이런 거 없었는데예.”
“뭐가 없어. 네가 서명했잖아.”
“그때 본 종이랑 다릅니다.”
“증거 있어?”
미달이는 말을 잃었다.
신애가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복사할게요.”
이태구 실장이 곧바로 종이를 빼앗았다.
“외부 반출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사진 찍을게요.”
신애가 휴대전화를 꺼내자 사무실 안쪽에 있던 남자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미달이의 승합차를 운전했던 남자였다.
그가 신애 앞을 가로막았다.
“촬영 금지입니다.”
“비켜요.”
“좋게 말할 때 나가세요.”
미달이는 신애의 손목을 잡았다.
“됐다. 가자.”
“계약서 못 받았잖아.”
“경찰 가면 된다.”
미달이가 경찰을 말하자 이태구 실장이 피식 웃었다.
“가봐.”
그는 서류철을 덮었다.
“경찰이 누구 말을 믿을까? 정상적으로 계약하고, 일하고, 돈까지 받아놓고 이제 와서 강제로 시켰다고 하면?”
신애가 말했다.
“미달이 얼굴에 주사 놓은 사진도 있어요.”
“본인이 체험에 동의했으니까 찍은 거지.”
“동의 안 했다고요.”
“증명해봐.”
“불법 시술소였잖아요.”
“그것도 증명하고.”
이 실장은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찰 조사 들어가면 네 사진도 다 제출해야 해. 네가 아주머니들한테 안 아프다고 말한 영상, 기계 효과 좋다고 한 영상, 전부.”
미달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영상도 찍었습니까?”
“행사 영상이야.”
“허락도 안 받고예?”
“계약서에 있어.”
이 실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피해자인지 같이 일한 사람인지 경찰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미달이는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말을 믿고 결제하러 들어간 사람들.
아프지 않다고 했다.
효과가 있다고 했다.
무료라면 다시 하겠다고도 했다.
신애가 말했다.
“미달이는 속아서 한 거예요.”
“그건 미달 씨가 설명해야지.”
이태구 실장이 미달이를 보며 물었다.
“속았어?”
미달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두 번째 날에는 알고도 갔다.
기계가 위험하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거짓말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돈 때문에 남았다.
이 실장은 미달이의 침묵을 기다렸다가 웃었다.
“봐. 자기도 잘 모르잖아.”
신애가 미달이 앞을 막아섰다.
“오늘부터 안 나옵니다.”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미달아, 가자.”
신애가 미달이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문 쪽으로 움직이자 이태구 실장이 말했다.
“진주에 십오만 원 보냈지?”
미달이의 걸음이 멈췄다.
신애도 돌아보았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급여 정산하려면 계좌 흐름 정도는 알아야지.”
“제 통장을 봤습니까?”
“회사에서 만든 출금 동의서에 서명했잖아.”
미달이는 다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런 기억은 없었다.
이태구 실장이 말했다.
“지금 그만두면 어제까지 발생한 비용부터 정산해야 해.”
“얼만데예?”
“계산해봐야 알겠지만.”
그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교육비 삼십. 현장 취소 위약금 십오. 의상비, 차량비, 관리비 합쳐서…… 대충 육십칠만 원.”
“제가 받은 돈은 이십만 원인데예.”
“그거랑 별도지.”
“말이 됩니까?”
“계약서에 써 있어.”
“그런 돈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해서 갚아야지.”
신애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게 깡패랑 뭐가 달라요?”
남자 직원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목소리 낮추세요.”
이태구 실장은 손을 들어 직원을 멈췄다.
“미달 씨.”
그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나는 미달 씨 사정 이해해. 영주 처음 올라와서 돈은 벌고 싶은데, 방세에 생활비까지 나가니까 얼마나 막막하겠어.”
미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제 좋은 일 있다고 했잖아.”
그는 책상 서랍에서 다른 전단 한 장을 꺼냈다.
전단 위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청운생활지원센터 여성 직원 모집
기숙사 무료 제공.
하루 두 끼 식사 제공.
셔틀버스 운영.
미달이가 영주에 오기 전 보았던 채용 공고와 거의 같은 문장이었다.
이태구 실장이 말했다.
“방값 안 나가고 밥값 안 나가고 교통비도 안 들어. 지금보다 현장도 꾸준하고.”
“무슨 일인데예?”
“생활용품 체험 보조하고 물품 관리.”
“또 시술받는 일 아닙니까?”
“아니야. 싫으면 그런 일은 빼줄게.”
미달이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전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숙사가 무료였다.
하루 두 끼 밥을 줬다.
셔틀버스도 운영했다.
매달 가장 많이 나가는 돈 세 가지가 모두 사라지는 조건이었다.
“급여는예?”
“처음 삼 개월은 이백삼십.”
“진짜 다 받을 수 있습니까?”
“기숙사비도 없고 수수료도 없어.”
신애가 전단을 낚아챘다.
“그런 곳이면 왜 회사 이름이 없어요?”
“청운생활지원센터라고 적혀 있잖아.”
“주소는요?”
“직원 숙소라 외부에 공개 안 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안 적혀 있고요.”
“미달 씨한테 설명하고 있는데 친구분이 왜 자꾸 끼어들어?”
신애는 전단을 구겨 책상 위에 던졌다.
“미달아, 들을 것도 없어. 가자.”
미달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달아.”
“신애야.”
미달이는 신애를 보지 못한 채 말했다.
“나 니 방에서 언제까지 있을 수 있노?”
신애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원래 며칠만 있는 거였잖아.”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도 돼.”
“월세는?”
“나 혼자 살 때도 내던 돈이야.”
“밥값은?”
“한 사람 먹는 거나 두 사람 먹는 거나 비슷해.”
“도시락까지 매일 싸주는 것도?”
신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달이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니한테 계속 얹혀살 수는 없다.”
“누가 얹혀산다고 했어?”
“내가 그렇게 느낀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네가 짐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야.”
“아이다.”
미달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가 원래 짐인 기다.”
“박미달.”
“영주 와서 내 힘으로 한 게 뭐 있노. 방도 니가 빌려주고, 밥도 니가 해주고, 상처까지 니가 치료해주고.”
“친구니까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더 싫다.”
미달이는 마침내 신애를 바라보았다.
“내 니한테 미안해가 같이 못 살겠다.”
신애의 얼굴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굳었다.
미달이는 그 표정을 보자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말을 거두지 못했다.
이태구 실장은 두 사람 사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청운생활관에는 오늘 바로 들어갈 수 있어.”
그가 말했다.
“짐만 챙겨오면 돼.”
“오늘 바로예?”
“방 하나 비었거든.”
신애가 미달이의 팔을 잡았다.
“안 돼.”
미달이는 손을 떼어냈다.
“한 달만 해볼게.”
“어제도 하루만 한다고 했어.”
“이번에는 주사 안 맞는 일이라잖아.”
“아직도 저 말을 믿어?”
“안 믿는다.”
“그런데 왜 가?”
미달이는 한참 뒤 대답했다.
“믿을 데가 저기밖에 없으니까.”
신애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그 한마디에 미달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태구 실장은 다시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점심 전까지 결정해. 방은 기다려주지 않아.”
두 사람은 말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신애는 앞서 걸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미달이는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신애야.”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니 싫어서 나간다는 말 아이다.”
“알아.”
“그라모 얼굴 좀 봐라.”
신애가 걸음을 멈췄다.
“나한테 미안해서 나간다는 게 더 싫어.”
“와.”
“너는 나한테 받은 것만 세잖아.”
신애가 돌아보았다.
눈이 붉었다.
“네가 와서 내가 받은 건 왜 안 세는데?”
미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에 들어가면 불이 켜져 있고, 밥 먹으면서 말할 사람이 있고, 내가 만든 음식 맛있다고 해주는 사람이 생겼어.”
신애가 말했다.
“그것도 받은 거야.”
미달이의 입술이 떨렸다.
“신애야.”
“그 회사 기숙사 가지 마.”
“한 달만.”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올 것 같아.”
“내가 얼라인가. 싫으면 나오면 되지.”
“어제 계약서도 못 받았잖아.”
“이번에는 꼼꼼히 볼게.”
“또 사인부터 시키면?”
“안 하면 되지.”
“휴대전화 뺏으면?”
“몰래 하나 더 챙기면 된다.”
미달이는 일부러 웃었다.
“나도 이제 영주 물정 쪼매 안다.”
신애는 웃지 않았다.
그날 오후, 미달이는 여행가방을 다시 펼쳤다.
영주에 온 지 나흘 만이었다.
짐은 처음보다 많지 않았다. 입었던 옷을 다시 접고, 세면도구와 충전기를 챙겼다. 신애가 붙여준 거즈와 연고도 가방 한쪽에 넣었다.
노란 보온도시락은 부엌에 두려 했다.
신애가 그것을 씻어 가방 안에 넣었다.
“이것도 가져가.”
“거기서 밥 준다.”
“안 줄 수도 있잖아.”
“하루 두 끼 준다 캤다.”
“먹을 수 있는 밥이라고는 안 했잖아.”
미달이는 도시락을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니 써라.”
신애가 다시 넣었다.
“네 이름 써놨어.”
도시락 뚜껑에는 검은색 네임펜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박미달.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잃어버리면 허신애에게 연락할 것.
미달이는 글씨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니가 언제 이런 걸 썼노.”
“아침에.”
“내가 잃어버릴 줄 알고?”
“네가 길을 잘 잃어버리잖아.”
“영주 지하철 한 번 헤맨 거 갖고 아직도 그러나.”
“물건 말고 너.”
신애가 말했다.
미달이는 도시락을 가방 안에 넣었다.
현관을 나서기 전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달 뒤에 온다.”
미달이가 말했다.
“매일 전화해.”
“알았다.”
“주소 보내고.”
“알았다니까.”
“이상한 일 시키면 바로 나와.”
“그래.”
“돈 없어도 돼.”
“그건 안 된다.”
“미달아.”
“내 진짜 잘해서 돈 많이 벌어올게.”
미달이는 신애를 안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팔을 두르던 신애가 곧 미달이의 등을 세게 끌어안았다.
“돈 말고 그냥 와.”
신애가 말했다.
미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태구 실장이 보낸 승합차가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미달이가 가방을 끌고 내려가자 운전기사가 짐을 받아 차 뒤에 실었다. 이태구 실장은 타고 있지 않았다.
승합차 안에는 여자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미달이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누구도 인사하지 않았다.
미달이는 맨 뒤쪽 빈자리에 앉았다.
신애가 차창 밖에 서 있었다.
“도착하면 전화해!”
미달이는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라!”
차문이 닫혔다.
승합차가 출발하자 신애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미달이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신애는 차가 골목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는 한 시간 가까이 달렸다.
미달이는 어디쯤 왔는지 시간을 확인하려 폴더폰을 열었지만 운전기사가 말했다.
“휴대전화 제출하세요.”
“와예?”
“생활관 규칙입니다.”
미달이의 얼굴이 굳었다.
“퇴근하고는 돌려주는 거지예?”
“필요할 때 돌려드립니다.”
“매일 전화해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생활관 공용전화 쓰면 돼요.”
“아니, 그래도 제 폰인데…….”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은 다 냈습니다.”
앞쪽에 앉은 여자들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미달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운전기사는 그것을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봉지 표면에는 검은색 숫자가 적혀 있었다.
17.
“이게 뭡니까?”
“미달 씨 생활 번호입니다.”
“이름 있는데 번호는 와 씁니까?”
“관리하기 편해서요.”
차는 독산동 공장지대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건물들 사이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오래된 공장과 창고 사이에 회색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간판은 없었다.
창문은 모두 회색 시트지로 가려져 있었다.
미달이가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여기가 청운생활관입니까?”
운전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관문 옆에는 초인종 대신 번호키만 달려 있었다. 운전기사가 비밀번호를 누르자 안에서 잠금장치가 풀렸다.
1층 로비에는 낡은 소파와 신발장이 있었다.
벽에는 생활 수칙이 붙어 있었다.
외출 시 관리자 허가 필수.
외부인 출입 금지.
개인 휴대전화 사용 제한.
배정된 근무 및 셔틀 탑승 거부 금지.
미달이는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근무 거부 금지는 무슨 뜻입니까?”
관리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짧은 파마머리를 한 중년 여자였다. 목에는 호루라기가 걸려 있었다.
“일하러 왔으면 배정받은 일 해야죠.”
“저는 시술 같은 일 안 한다고 듣고 왔는데예.”
“그건 실장님한테 물어보세요.”
“실장님이 그런 일은 빼준다 했습니다.”
관리자는 서류를 넘겨보았다.
“여기에는 그런 내용 없는데.”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녹음했어요?”
미달이는 입을 다물었다.
관리자는 미달이의 가방을 열었다.
“지금 뭐 하십니까?”
“반입 금지 물품 검사요.”
관리자는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하나씩 꺼냈다. 지갑도 열어보았고, 연고와 거즈까지 확인했다.
노란 도시락이 나오자 잠시 멈췄다.
“개인 음식물 반입 금지예요.”
“도시락은 빈 겁니다.”
“부엌 물건도 개인 사용 금지.”
“이건 제 친구가 준 겁니다.”
“그럼 나갈 때 돌려드릴게요.”
관리자가 도시락을 가져가려 하자 미달이가 빼앗았다.
“이건 제가 가지고 있을랍니다.”
“규칙이에요.”
“빈 통 하나 갖고 있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관리자가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미달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관리자가 손을 놓았다.
“분실해도 책임 안 집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미달이는 도시락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방은 4층 복도 끝에 있었다.
문을 열자 이층침대 세 개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침대 사이에는 한 사람이 옆으로 겨우 지날 정도의 공간만 남아 있었다.
창문에는 회색 시트지가 붙어 있어 밖이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여자 다섯 명이 있었다.
누군가는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벽을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관리자가 창문 옆 아래 침대를 가리켰다.
“17번은 저기.”
침대 머리맡에는 검은 매직으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17.
미달이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밥은 언제 줍니까?”
“저녁 일곱 시.”
“하루 두 끼 맞지예?”
“아침, 저녁.”
“점심은예?”
“현장에서 알아서.”
“공고에는 하루 두 끼라 적혀 있던데.”
“그러니까 아침하고 저녁 주잖아요.”
저녁 일곱 시가 되자 복도에 종소리가 울렸다.
여자들은 줄을 서서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판에는 밥 한 덩이와 묽은 미역국, 김치 세 조각이 놓여 있었다.
반찬을 더 달라고 한 여자에게 관리자는 말했다.
“추가는 급여에서 차감이에요.”
미달이가 물었다.
“밥 더 먹는 것도 돈 냅니까?”
“기본 식사만 무료예요.”
“그라모 반찬은예?”
“기본으로 나갔잖아요.”
미달이는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신애가 싸준 도시락의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미역국을 조용히 떠먹고 있었다. 스물둘쯤 되어 보였다. 얼굴 한쪽에 노란 멍이 퍼져 있었다.
미달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오래 계셨습니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오늘 처음 왔는데예.”
숟가락이 잠시 멈췄다.
여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입술만 움직였다.
“말 많이 하지 마.”
“와예?”
“다 들어.”
그 순간 식당 천장에 달린 검은 반구형 카메라가 움직였다.
미달이 쪽으로 렌즈가 돌아왔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식사가 끝난 뒤 미달이는 공용전화를 찾았다.
로비 구석에 낡은 유선전화가 놓여 있었다. 수화기를 들자 신호음이 들리지 않았다.
“전화 고장 났습니까?”
관리자는 텔레비전을 보며 대답했다.
“관리자 승인 있어야 걸 수 있어요.”
“친구한테 도착했다고 해야 됩니다.”
“내일 하세요.”
“오늘 매일 전화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은 입소 교육 때문에 안 돼요.”
“그라모 휴대전화 잠시만 주이소.”
“보관함 잠갔어요.”
“열면 되잖습니까.”
관리자는 미달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규칙 적응 못 하면 오래 있기 힘들어요.”
미달이는 계단을 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여자들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달이는 가방에서 노란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 뚜껑에 적힌 신애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갔다.
잃어버리면 허신애에게 연락할 것.
미달이는 도시락을 베개 밑에 넣었다.
맞은편 아래 침대의 여자가 몸을 돌렸다.
식당에서 말을 걸었던 여자였다.
“그거 숨겨.”
“뭘예?”
“노란 통.”
여자가 속삭였다.
“관리자가 밤에 방 뒤져.”
“빈 도시락인데 와 가져갑니까?”
“나갈 때 돈 될 만한 건 다 가져가.”
“나갈 때예?”
미달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언제 나갈 수 있는데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급히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관리자가 문을 열고 방 안을 훑어보았다.
“내일 새벽 다섯 시 기상입니다. 번호대로 셔틀 타세요.”
“어디로 가는데예?”
미달이가 물었다.
“17번은 강남.”
“무슨 일입니까?”
“가면 설명해줘요.”
“저 시술받는 일은 안 합니다.”
관리자는 미달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건 17번이 정하는 게 아니에요.”
문이 닫혔다.
미달이는 곧바로 일어나려 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 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면 현관문이 있고, 그 문만 열면 영주였다.
신애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맞은편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려가지 마.”
“와예?”
“열 시 지나면 현관문에 경보 걸려.”
“그라모 창문으로라도 나가면 되지.”
“창문 열어봐.”
미달이는 회색 시트지로 덮인 창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창틀에는 나사가 박혀 있었다.
창문은 열리지 않도록 고정돼 있었다.
미달이는 나사를 손톱으로 긁었다.
“이게 뭐고.”
맞은편 여자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여기 기숙사 아니야.”
“그라모 뭔데예?”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복도 끝에서 열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찰칵.
관리자가 방마다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여자는 미달이를 바라보았다.
“돈 없는 애들 보관하는 데.”
잠시 후 미달이의 방에서도 열쇠가 돌아갔다.
찰칵.
미달이가 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여이소.”
복도에서 관리자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 잠갔습니까?”
미달이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사람 안에 있는데 와 문을 잠급니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미달이가 계속 문을 두드리자 방 안의 여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중 위층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만해.”
“문을 잠갔잖습니까.”
“알아.”
“그라모 다들 가만있으면 우짭니까?”
여자는 어둠 속에서 미달이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다 그래.”
“뭐가예?”
“문 두드리고, 경찰 부른다고 하고, 돈 안 받아도 되니까 보내달라고 해.”
미달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고 나면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미달이는 문에 귀를 댔다.
관리자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예, 실장님.”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17번 입소했습니다.”
미달이는 숨을 죽였다.
“예. 휴대전화도 받았고요.”
관리자가 웃었다.
“내일은 얼굴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아직 붓기 남아 있으면 마루타로 쓰기 좋을 것 같습니다.”
미달이는 문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방 안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태구 실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집으로는 연락 못 하게 해.”
관리자가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17번은 돌아갈 데 있다고 착각하니까, 그것부터 없애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