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를 잃는 순간, 세상은 조용해진다.
장한솔은 아이들과 약속할 때마다 날짜 대신 계절을 말했다.
봄에는 놀이공원에 가자.
여름이 되면 수영장에 가자.
단풍이 들면 도시락을 싸서 영주숲에 가자.
약속한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세 사람은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한솔은 늘 바빴다.
출근하기 전에는 아홉 살 지우의 머리를 묶고, 일곱 살 하윤의 양말을 찾아주었다. 퇴근한 뒤에는 식은 밥을 데우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잠든 아이들의 알림장을 확인했다.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랑 놀기 싫어?”
하윤이 물었을 때 한솔은 화를 냈다.
“엄마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후회했지만, 사과는 다음 날로 미뤘다.
한솔은 대부분의 것을 다음 날로 미루며 살았다.
그날 밤, 지우가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문을 닫고 한동안 소곤거렸다.
한솔은 방문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피곤할 때는 너무 길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한솔은 휴대전화 달력에 토요일을 표시했다.
회사 단체 대화방을 나가고 업무용 알림을 모두 껐다.
“이번 토요일은 진짜야.”
“진짜라는 말도 이제 세 번째야.”
지우가 대답했다.
하윤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안 지키면?”
한솔은 잠시 생각하다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엄마가 너희 소원 하나씩 들어줄게.”
“뭐든지?”
“뭐든지.”
아이들이 가고 싶다고 한 곳은 영주의 세명백화점이었다.
거창한 장소는 아니었다.
지우는 학교에서 쓸 녹음기를 사고 싶어 했고, 하윤은 백화점 꼭대기에 있다는 실내 정원을 보고 싶어 했다. 두 아이는 어디에 가느냐보다 엄마와 간다는 사실에 더 들떠 있었다.
토요일 아침, 한솔은 오래된 회색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입었던 옷이었다. 소매 끝은 닳았고 허리끈의 금속 고리는 검게 변해 있었다.
지우가 현관 앞에서 한솔의 손목을 붙잡았다.
“엄마 시계 또 멈췄어.”
한솔은 은빛 손목시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초침 소리는 들렸지만 불규칙했다.
“백화점 가서 고쳐야겠다.”
“버리고 새로 사.”
“이거 외할머니가 준 거야.”
한솔은 용두를 몇 번 돌린 뒤 시계를 다시 찼다.
백화점은 밝고 시끄러웠다.
매장에서는 서로 다른 음악이 흘러나왔고, 천장 조명이 대리석 바닥에 겹겹이 비쳤다. 사람들은 쇼핑백을 들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윤은 액세서리 매장 앞에서 노란 병아리 머리핀을 골랐다.
한솔이 머리에 꽂아주자 아이가 거울을 보며 물었다.
“나 이제 봄 같아?”
“응. 완전 봄이야.”
“밖은 여름인데?”
“너는 사계절 내내 봄이야.”
지우가 옆에서 작게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웃었다.
한솔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다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사진보다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는 문구 매장에서 손바닥만 한 녹음기를 샀다.
학교 과제는 ‘가족의 하루 기록하기’였다.
“엄마 목소리도 녹음할 거야.”
“예쁘게 말해야겠네.”
“평소처럼 말하면 돼.”
지우는 녹음기를 켠 채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다.
하윤의 웃음소리, 에스컬레이터 안내음, 한솔이 아이들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작은 기계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세 사람은 6층 가족휴게실에 도착했다.
한쪽에는 작은 실내 정원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창가 테이블과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주말인데도 다른 층보다 조용했다.
하윤은 연못 장식에 떠 있는 조화를 들여다봤다.
지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영주의 건물들을 녹음기에 설명했다.
한솔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 부장이었다.
한솔은 화면을 바라봤다.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전화는 끊어졌다가 곧바로 다시 걸려 왔다.
“엄마.”
지우가 불렀다.
“금방 올게.”
한솔은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전화만 받고 올게.”
지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또 금방이야?”
한솔은 대답하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휴게실 밖으로 나간 한솔은 긴 복도 끝에 섰다. 통화는 고작 삼십 초 만에 끝났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다음 주 회의 자료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한솔은 전화를 끊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그때 복도 아래층에서 짧고 둔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무언가 쓰러진 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후 두 번째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왔다.
한 남자가 소리쳤다.
“총이야!”
한솔은 가족휴게실을 향해 달렸다.
세 번째 총성이 울렸다.
사람들이 한솔과 반대 방향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깨가 부딪히고, 휴대전화가 손에서 떨어졌다. 누군가 한솔을 붙잡으며 내려가야 한다고 외쳤다.
한솔은 그 손을 뿌리쳤다.
유리문 너머로 지우와 하윤이 보였다.
지우가 동생을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하윤의 머리에서 노란 병아리가 흔들렸다.
한솔은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총성과 비명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 17분.
초침이 숫자 사이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솔은 닫히기 시작한 유리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우의 녹음기 안에는, 그 뒤로 단 19초의 소리만 남았다.